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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용어 이해하기

미술용어 - 추상미술 abstract art

by 이자벨우 2024. 2. 10.
추상미술 abstract art

 
비대상미술(比對象美術), 비구상미술, 비재현적 미술이라고도 하며, 때로는 구체미술이라고도 불린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사물을 묘사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미술을 가리킨다. 자연의 구체적 대상을 거의 재현하지 않고 색, 선, 형 등의 추상적 형식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미술을 총칭하는 것으로, 20세기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주류의 하나를 이룬다. 모든 미술은 형태, 색채, 질감, 화면의 크기, 테마의 크기 및 넓이 등 추상적인 제요소로 성립되고 그 양식도 주로 이것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들 제 요소가 신들을 찬미한 인간의 모습이나 사상(事象) 등을 나타내려는 기술적, 묘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 표현보다는 설명의 역할이 지배적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추상미술은 19세기에 시작된다. 이 시대에는 고대 신화나 중세 이야기에서 화제(畵題)를 취하여 극명한 묘사를 주로 하는 미술이 성행하였고, 그와 동시에 들라크루아(1798~1863)가 ‘회화란 이름의 음악’이라 불렀던 방향으로 회화를 발전시키고자 한 화가들은 자연주의의 전통에 의문을 품고 주관과 회화 쌍방의 시각적 사실을 접근시키고자 했다. 더 나아가 낭만주의의 화가들은 모방과 이상화를 강조했던 고전주의를 부정하고 상상력, 무의식, 그리고 우연성까지도 본질적인 창조의 요인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생략)

그리고 선, 색채, 표면 등의 비묘사적, 표현적인 성질을 근거로 한 아르 누보의 대담한 실험적 디자인은 회화와 밀접한 분야에서 처음으로 추상의 영역을 확대시켰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초의 십수년 간에 걸쳐 주요한 운동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지 미술과 자연의 외관 사이의 균열을 강조했다. 한편 영화는 그 자체로 이야기적 형식을 지니기 시작했다. 또 표현주의의 여러 가지 형식은 원시 미술에 고무되어 눈에 보이는 세계의 상을 왜곡, 변형하여 표현함으로써 강한 감정을 전하고자 했다. 야수주의에서는 이미 고갱(1848~1903)이 주장해 온 색채의 해방을 추진했다. 세잔느(1839~1906)를 선구자로 하는 입체주의는 본질적으로 회화적인 구성을 목표로 자연의 사물을 단편화하여 화면에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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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미래주의는 20세기 역사의 급속한 전개에 합치하는 속도감을 표현함으로써 일종의 시각 언어를 창출해 냈다. 미래주의의 발라(1871~1958)는 대담하게도 미래주의의 틀을 뛰어넘어 기하학적인 패턴을 그렸으나, 다른 많은 작가들의 경우, 적어도 구도란 목적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계의 단편에서 완전히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설사 화면의 형상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구상적이어도 형상에서 추상하는 것과, 볼 수 없는 내적 세계를 그린 비묘사적 형태만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칸딘스키 바실리 <검은 색의 호가 있는 그림>1912년 (파리 국립 근대미술관) 출처-세계미술용어사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4, 5년 전에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몇몇 화가들, 즉 들로네(1885~1941), 칸딘스키(1866~1944), 말레비치(1878~1935), 타틀린(1885~1953) 등은 근본적인 추상 미술을 추구했으나, 전위적인 예술가가 되어 일체의 묘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직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대전 중에 네덜란드의 데 스틸의 멤버였던 몬드리안(1872~1944)과 반 되스부르크(1883~1931) 등과 취리히 다다 그룹, 특히 아르프(1887~1966)가 출현, 추상미술의 영역을 한층 확대시켰다. 추상미술은 요소주의와 자유 추상, 두 가지로 나뉜다.
 

<노랑과 파랑의 콤포지션> 몬드리안 1929년 52x52cm (로테르담 보이만스 반 보이닌헨미술관) 출처-미술대사전(용어편)


특히 러시아의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말레비치와 신조형주의의 창도자였던 몬드리안은 작품의 표현을 최소한도의 기본적인 형태와 색채로 한정시켰다. 다른 작가들도 구도를 결정하는 데에 기하학적 또는 수학적인 계산을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요소주의 작품이 합리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강조하여 그것을 자연과 대립시켰다. 요소주의 예술은 미술 이외의 영역, 특히 타이포그래피(인쇄술)와 건축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부생략) 한편 자유 추상은 표현주의자(1910~1920의 칸딘스키)에 의해서든 서정주의자(아르프)에 의해서든 모두가 감정과 직관을 근거로 했고, 그 까닭에 발상이 주관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칸딘스키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1912)과 잡지 《데 스틸》(1917~1919)은 이 양 방향의 기본적인 철학을 분명히 하고 있다. 추상미술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는 그렇게 성행하지 않았다. 전체주의 정치와 초현실주의와 같은 심상(心象)을 새롭게 강조하는 예술 운동이 성하여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세르클 에 카레’나 ‘추상 창조’라는 전시회나 출판을 했던 파리의 그룹이 수개국의 추상작가를 위한 세력 만회의 거점을 제공해 주었고, 또 1930년대에는 조각에서 약간의 진전을 보였다.

(일부생략)

유럽 대륙에서는 빌이나 바자렐리Victor Vasarely 등이 요소주의의 원리를 추구했고, 또 폰타나Lucio Fontana 등은 자유 추상, 혹은 유럽에서 앵포르멜이라는 예술을 새로운 극한까지 이끌어갔다. 추상미술이 너무 눈의 감각에만 호소한다는 비난도 있다. 그러나 이 감각적인 어필은 음악에 있어서와 같이 지적이고 분석적인 수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확실히 추상미술은 미술 일반의 추상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을 세련되게 하였고 또 설명적 묘사에 따르지 않은 커뮤니케이션에의 이해를 증대시키는 데 기여한 바 크다. 또한 추상미술이 현대 건축이나 공예 디자인에 미친 커다란 영향은 금세기에 있어서의 추상미술의 결정적인 역할을 입증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추상미술 [抽象美術, abstract art]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