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토리얼리즘 Pictorialism
회화주의로 번역된다. 흔히 말하는 '예술사진'과 같은 의미로 통용되며 1880년대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성행한 회화적 사진경향이다. 사진의 제작은 1839년 프랑스의 L. J. M. 다르게에 의해 최초로 실현된 이래 영국의 아처, 머독스에 의해 습판법, 건판법 등 여러 가지 사진술이 개발되어 사진뿐 아니라 회화, 디자인, 영화 등 예술 전분야에서 다각도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사의 동을 트게 한 인상주의에서는 사진술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시각적 조형성을 구사하여 도리어 사진계에 역으로 영향을 미쳐 영국, 프랑스 등의 사진작가들이 사진의 단순한 기록성을 배격하고 회화적 감성을 사진영역에 끌어들이게 만들었다. (일부생략)
에머슨은 의학에서 사진으로 전향한 인물로 사진기법의 예술화를 주장함으로써 사진을 단순한 기술적 재현이 아닌 예술적 차원으로 승격시켰다. 그는 1886년 3월 런던의 카메라 클럽에서 <사진술:회화적 예술>이라는 연설을 통해, 존 러스킨을 과학과 예술의 어떤 연관도 거부했다는 이유에서 '발작적으로 고상한 체하는 문학예술가'라고 비난하고 (<사진의역사>, Beaumont Newhall, 정진국 역, 1987), 미술과 과학이 분리되어온 것과 무표정하고 예술적 정감이 결여된 기존의 사진에 대해 맹렬한 부정론을 펼침으로써 픽토리얼리즘 태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사진미학은 세기가 바뀔 무렵에는 열렬한 찬동자들에 의해 정식으로 '픽토리얼리즘'으로 불리게 되었다. 스티글리츠는 1887년 런던의 한 전시회에서 에머슨에 의해 발탁된 후 픽토리얼리즘에 가담한 작가로 이후 1905년 291 화랑을 세운 뒤 약 10년 후부터는 스트레이트포토를 추종하였다.
(일부생략) 이 계통의 주요 그룹으로는 빈에서 결성된 카메라 클럽, 파리의 사진 클럽, 1902년 2월 스티글리츠의 주도 아래 뉴욕에서 결성된 포토 세제션이 있으며, 이 그룹들의 활약으로 미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경향은 매너리즘에 빠졌고 랄프 스타이너, 안셀 애덤스 같은 사진작가들에 의해 사진 본래의 특성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회화적인 측면을 강조한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회화에 근거한 사진미학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약 20년 이상 지속된 픽토리얼리즘은 회화적 요소가 배제된 정통 사진, 즉 스트레이트 포토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 경향에서 예술로서의 사진의 위상을 높이려던 노력은 사진의 차원을 높인점에서 오늘날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20세기 초 다다 작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포토그램, 1970년대에 유행한 머니퓰레이티드포토 등의 초석이 되었다.
출처 - 현대미술사전,안연희,1999,미진사 ≪일부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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