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미술 화가이야기

렘브란트 반 레인 REMBRANDT VAN RIJN

by 이자벨우 2024. 1. 27.

<자화상> 렘브란트 1640년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여 ‘야경’과 같은 수많은 걸작을 그렸고 당대에 명성을 얻었다. 인간애라는 숭고한 의식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스며들게 하였으며 종교적인 작품에서조차 이러한 자신만의 특징을 유지했다.

 

출생 1606년 7월 15일 ~ 사망 1669년 10월 4일

 

예술양식 -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 도안가 · 판화가, 명암의 혁신적인 사용, 초상화 · 자화상 · 성서를 주제로 한 작품 · 역사화

 
렘브란트 반 레인은 미술사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어릴 적에 일찍 학교 교육을 그만두고 화가로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역사화가 야코프 이삭스존 반 스바넨부르크 밑에서 3년간 배운 후,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네덜란드에서 손꼽히는 역사화가 페테르 라스트만 밑에서 짧게 도제 생활을 했다. 새로운 기술들을 익힌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공방을 열었고, 많은 자화상들을 그렸다.

그는 자신의 상을 포착하기 위해 두 개의 거울을 사용하여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곤 했고, 자화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극적인 장면에서도 이런 감정들을 전달했다. 그 당시의 비평가들은 이 방법을 전혀 쓸데없는 짓이라고 충고했으나, 후대의 사람들은 이것은 자아에 대한 탐구였을 뿐 아니라 미술에 대한 탐구였다고 평가했다.

렘브란트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여 물감의 농도와 빛의 역할을 실험했다. 키아로스쿠로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기법으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작품들에서 처음 사용되어 유명해졌다.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밝은 부분이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그 주위와 배경에 어두운 부분이 넓게 배치되어, 마치 어둠 속에서 집중 조명을 받는 것처럼 밝은 부분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728x90


그는 동시대의 많은 화가들이 표현하던 주제 문제에 있어서의 엄격한 형식성을 제거함으로써 이와 같은 방법을 자신만의 전유물로 만들었고, 인간애라는 숭고한 의식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스며들게 했다. 렘브란트는 비범한 사람들 속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주목하고, 작품에 일상생활을 그렸으며, 종교적인 작품에서조차 이러한 자신만의 특징을 유지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직접 인쇄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에칭들을 제작했다. 그는 평생 회화로 얻은 명성만큼이나 판화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년 169.5X216.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렘브란트의 작품은 오라니에 공의 비서인 콘스탄테인 호이헨스의 눈길을 끌어 헤이그 궁정으로부터 보수가 큰 몇 건의 주문들을 받았다. 렘브란트는 1631년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미술상인 헨드리크 반 오일렌부르그의 집에서 생활하며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한 외과의사인 니콜라스 툴프 박사를 그리는 의뢰를 받아 이를 작업했다.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경)는 17세기의 수술실 안에서 벌어지는 움직임들을 세밀하게 묘사한 놀라운 그룹 초상화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명함과도 같았다. 그는 곧 부유한 귀족들을 위한 초상화 제작을 독점해가기 시작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제자들을 양성하고자, 1634년에 성 루가의 길드에 가입했다. 그는 인기 있는 스승이 되었고 그의 공방은 번창했다. 그는 같은 해에 헨드리크의 조카인 사스키아 반 오일렌부르그와 결혼했다.

그들은 임대한 집에서 살다가, 후에 유대인 거주 지역에 있는 호화로운 저택을 샀다. 이 저택의 구입은 말년에 렘브란트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렘브란트는 성서를 주제로 한 연작과 대작 역사화들로 더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작품 중 최고인 <야경>(1642)은 그의 양식적인 발전 과정에서 전환점이 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야경> 1642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렘브란트는 활동 말기를 향해 갈수록 점차 제작하는 작품의 수가 줄어들었으나, 새로운 표현 방식을 모색함에 따라 그의 작품은 서서히 발전했다. 그의 화법은 더 대담해지고 과감해졌으며 전체적으로 활기를 띠게 된 반면에, 그가 그린 인물들은 몸짓과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렘브란트 미술의 절정기로 여기고 있다. 렘브란트는 더 이상 작품 주문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 소장용으로 미술품들을 계속 사들이다가 1656년에 공식적으로 파산을 선고했다. 그의 저택과 재산은 경매로 처분되었다.

렘브란트는 1669년에 죽을 때까지 그 어떤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과도 견줄 수 있는 걸작들을 제작했다. 그는 붓, 분필, 에칭용 조각칼을 사용하여 최고의 솜씨로 인간의 형상과 감정을 정교하게 묘사해냈다. 렘브란트는 이전에는 결코 본적이 없었던, 그리고 이후에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관찰했다.
 

걸작의 보존


<야경>으로 더 많이 알려진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과 빌렘 반 로이텐부르그의 민방위대>(1642)만큼 많은 역경을 겪었다고 자랑할 만한 작품도 드물다. 이 그림은 18세기 말에 암스테르담 시청 내부에 알맞은 크기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이 보는 그림은 원작이 아니다. 이 그림은 1939년에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에 걸려 있었다.

나치가 침공하자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한 시골로 옮겨졌고, 요새화된 성 안에서 자물쇠가 채워진 채 보관되었다. 주변의 적들 때문에 이 그림은 또 다시 옮겨졌는데, 배로 운반되어 대장간의 창고에 잠시 보관되었다가, 북해 연안의 모래 언덕 아래 깊숙한 지하실의 철제 원통에 담겨 보관되었다. 이 장소도 안전하지 못하게 되자, 이 그림은 마스트리히트 근처 언덕의 지하 동굴 방공호로 급히 옮겨졌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걸린 <야경>은 두 차례의 우발적인 습격을 받았다. 첫 번째는 1975년에 이 그림 속 코크 대장을 악마라고 믿은 한 남자가 조각칼을 휘두른 것이고, 두 번째는 15년 후에 한 남자가 그림 속 알레고리적 여성 인물에 산을 뿌린 것이다. 놀랍게도, <야경>은 이 모든 역경을 견뎌내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그 영광스러운 화려함을 과시하고 있다.

"그에게는 붓과 기교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제라드 드 레이생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렘브란트 반 레인 [REMBRANDT VAN RIJN]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스티븐 파딩, 위키미디어 커먼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