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용어 - 다다 Dada
다다 Dada
1915~1922년경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반문명, 반합리적인 예술운동. 제1차 세계대전을 초래한 전통적인 서구 문명을 부정하고 기성의 모든 사회적, 도덕적 속박에서 정신을 해방하여 개인의 진정한 근원적 욕구에 충실하고자 했다. 다다란 여러 나라의 말에서 찾을 수 있는 단어로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고 프랑스어로 ‘목마’를 의미하며, 슬라브어에서는 ‘예, 예’를 뜻한다. 다다란 명칭이 탄생한 경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그중 1916년 시인인 차라(1896~1960)가 사전을 놓고 펜나이프를 아무데나 집어넣어 나온 다다라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음성어를 그 명칭으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다다는 제1차 세계대전 중과 그 직후에 전세계로 급속히 확대되어 갔는데, 처음에는 취리히, 뉴욕, 바르셀로나 같은 중립도시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베를린, 쾰른, 파리에서 일어났다. 루마니아의 시인 차라, 독일의 작가 발(1886~1927), 휠젠벡, 스위스의 화가 아르프(1887~1966) 등이 그 선도자였으며, 다다의 파괴적인 주장은 기관지인 《다다》 제3호에 실린 <다다 선언>에서 잘 엿볼 수 있다. 독일에서는 반전운동과 공산주의에 결합된 베를린 다다가 1919년에 결성되었다. 또 1919년 쾰른에서는 아르프와 에른스트(1891~1976)에 의해 전람회가 개최되었으나, 당국에 의해 폐쇄됐다. 하노버에서는 1919년에 슈비터즈(1887~1948)가 메르츠를 창안해 냈다. 피카비아(1879~1953)는 바르셀로나에서 잡지 《391》을 창간하여 취리히 다다의 맥을 이었다.
파리에서는 같은 해 브르통(1896~1966), 아라공 등이 시(詩) 잡지 《리테라튀르Littérature》를 창간, 취리히 그룹의 거의 전원이 여기에 참가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유럽의 다다 운동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1912년경부터 이미 다다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던 뒤샹(1887~1968)이 만 레이(1890~1977)와 함께 뉴욕의 291 화랑에서 충격적인 전시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뉴욕 다다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1920년대 초기에는 다다 운동이 거의 전 유럽과 미국에까지 영향을 끼쳐 1922년 파리에서 대규모 국제전이 개최되었으나, 1924년 초현실주의가 발족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다다의 비합리적인 태도가 미술작품에만 국한되어 표현된 것은 아니다. 스튜디오에만 처박혀 작품을 제작하기보다는 선동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다다미술가들은 대중을 상대로 한 선동적인 이벤트를 마련했다. 그 결과, 다다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에서 민중을 선동할 목적으로 열린 여러 예술형태가 혼재된 프로그램에서부터 레디메이드와 같이 마치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는 듯한 뒤샹의 수많은 창작 작품들이 쏟아졌다. (일부생략)
다다는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천만명 이상 되는 사망자들의 비극적 희생에 대한 미술가들의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기계문명시대의 테크놀로지가 인류를 황폐케 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대 문명의 이기를 얻는 대가치고는 너무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 (일부생략) 이에 다다미술가들은 합리적인 것과는 정반대의 미술로 대응했다. 그들에게는 부조리와 장난기, 대항과 허무주의, 직관과 감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일부생략) 다다 미술은 부조리를 대담하게 표현해냄으로써 많은 관람자들을 격분케 했다. 부르주아 계급을 향한 다다의 비판적 태도는 다다뿐만 아니라 모든 현대미술의 특징이지만, 다다는 중산층의 도덕률을 거부했다는 사실로 볼 때 가장 신랄한 모더니스트로 꼽힐 만하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다다 [Dada]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